무방비도시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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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도시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안전한가-

아래 리뷰는 스포일러의 소지가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배우분들에 대한 존칭은 생략하였습니다.


손예진(백장미 역), 김명민(조대영 역), 김해숙(강만옥 역) 주연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영화 '무방비도시'가 1월 10일 개봉되었다. '와일드카드', '범죄의 재구성'의 계보를 잇는 웰메이드 정통 범죄 영화의 카피를 달고 나온 '무방비도시'.
과연 그 스포트라이트만큼의 완성도를 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무방비도시'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배우 손예진의 연기 변신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내 머리속의 지우개', '클래식', '작업의 정석' 등에서 보여졌듯이 손예진 하면 우선 청순하거나, 아니면 능청맞은 인상을 떠올리기 쉬웠다. 손예진은 이번 작품에서 그런 인상을 벗고 싶다는 듯이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도발적인 메이크업과 의상, 어딘지 조소를 머금은 듯한 행동으로 소매치기 조직의 사장 백장미 역으로 멋지게 분했다. 두말할 여지없이, '단순히 예쁘기만 한 배우'가 아니라 '연기 잘 하는 예쁜 배우'로 부르는데 주저함을 없애주었다.

그에 반해 조대영 역의 김명민의 연기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얀 거탑' '리턴' 등에서 인정받은 김명민의 연기력은 물론 뛰어남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대중이 김명민 하면 떠올릴 연기력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할까. 어딘지 정형적인 인물의 색깔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대영이라는 인물에 '조대영'이라는 사람보다는 '김명민이 연기하는 조대영'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뿐이었을까.

이런 형태의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기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사건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조연 배우들이 얼마나 잘 해주느냐가 작품을 살리는 중요한 요소이다. 주연인 김명민, 손예진, 김해숙을 비롯한 손병호, 김병옥, 윤유선 등의 조연 캐릭터들도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주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영화가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특히 강만옥 역의 김해숙의 연기는 그녀의 중견 배우로서의 저력을 여과없이 드러낸 압도적인 그것이었다.

배우들의 열연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방비도시'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감정축의 절묘한 조절 덕이 있었다고 본다. '무방비도시'에서 주된 감정의 축은 조대영│강만옥, 백장미│강만옥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상에서 조대영과 백장미 간의 감정은 강만옥이라는 교집합 사이에 성립된 것이지, 그 둘 사이에  직접적인 애틋함은 없었다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다. 만약 영화가 조대영│강만옥, 백장미│강만옥, 조대영│백장미의 세가지 감정축을 다루었다면 두 시간이라는 러닝 타임으로는 부족하지 않았을까. 억지로 우겨넣으려면 영화가 산만해질 수 있고, 인물 간의 갈등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미장센의 배치가 필요해진다. 미장센이 풍부한 영화는 시청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지나치게 상징적인 전개가 될 수도 있다는 단점 또한 내포한다. 적어도 '무방비도시'같은 현장감과 속도감이 중요한 영화에서는 적절한 선택이 아니리라.

김명민, 손예진, 김해숙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강만옥에 대한 경찰로서, 아들로서 느끼는 배신감과 강만옥이 보여주는 모정. 백장미의 소매치기 조직의 사장으로서의 행동 양태와 강만옥에 대한 여린 마음. 이 셋은 각각의 인물에 대한 이런 감정의 줄타기를 능숙히 해냈다. 이번 영화에서 손예진의 연기가 빛을 발한 것이 이 부분이었다.
'소매치기는 숨쉬는 소리조차 거짓말' 이라는 작중의 대사처럼 백장미는 조대영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된 가면을 쓰고 있다. 이때 손예진의 연기는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로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모습이다. 손예진은 배우지만 백장미는 배우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랬던 백장미조차 강만옥 앞에서는 그 가면을 쓰지 못했다. 백장미가 강만옥이 차린 식당에 가 그녀에게 협박(?)을 하고 돌아서는 장면에서 잡힌 손예진의 미묘한 표정이 실은 비정하지 못한, 백장미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낸 신이 아닌가 싶다.

'와일드카드', '범죄의 재구성'에서 그러했듯이, '무방비도시' 역시 범죄, 그중에서도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밀접하다면 밀접할 소매치기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소매치기는 나쁘다'에서 끝나지 않고 소매치기라는 범죄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소매치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이 영화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감독이 형사들과 동고동락했다는 에피소드만큼 그 묘사는 대단히 현실감이 있었다.)

영화 '무방비도시'는 딱히 신선한 연출 기법 등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잘 짜여진 플롯과 배우만으로도 잘 만든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음악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인상 깊었던 영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영화가 되리라 생각한다.